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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page 수리와 독립의 교육방침


 나는 어떻게든 양학이 성행하도록 해서 반드시 일본을 서양 같은 문명부강국으로 만들겠다는 야심을 품고있었다. 그 방편으로 게이오기주쿠를 서양문명의 안내자로 삼아, 마치 동도의 주인이 된 듯한 기분으로, 서양식의 독과점 혹은 특별 에이전트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면서 자진해서 외국인을 위해 일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었기 댸문에 보수적인 일본인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나의 교육방침은 자연의 원칙에 무게를 두고, 수와 이 두가지를 근본으로 하여, 세상만사 모든 일의 처리를 이로부터 시작하겠다는 것이었다. 또 한편으로 독덕론에 있어서는 인간을 만물 중 가장 고귀한 것으로 여기고, 스스로를 소중히 여겨 절대로 비열한 짓이나 방정치 못한 짓은 누가 부탁하건 아무리 긴급한 상황에서건 하지 않겠노라고, 항상 몸을 고귀하게 간직하며 이른바 독립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일단 목표를 정했다. 일심분란하게 이 목표에만 전념한 이유는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그 진보의 속도에 정말로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양쪽 모두 도덕의 가르침이 있고, 경제에 관한 지식도 있고, 문무에 제각기 장단점이 있으면서도, 일단 그 국세를 살펴보면 부국강병이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면에서 동양은 서양의 밑에 놓이게 된다. 국세의 정도는 국민의 교육수준에서 나온다고 본다면, 분명히 쌍방의 교육법에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동양의 유교주의와 서양의 문명중의를 비교해보니, 동양에는 유형의 것으로는 수리학 무형의 것으로는 도립심 이 두가지가 없었다. 정치가가 국사를 처리하는 것도, 실업가각 상거래와 공업에 종사하는 것도, 국민에게 보국의 생각이 많고, 가족이 단란한 정으로 충만한 것도, 그 유래를 따져보면 자연히 그 근본을 알 수 있다. 비근한 예를 들면 지금의 소위 입국이 그렇고 확대해서 말하면 인류 전체가 그렇듯이, 인간만사는 수리를 배놓고는 노할 수 없으면 독립 외에에는 의지할 곳이 없다는 소중한 진리를 우리 일본에서는 가볍게 여기고 있다. 이래서는 당장 문호를 개방해 서양강국들과 어꺠를 나란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는 오로지 한학교육 탓이라 스스로 굳게 믿고, 자본도 없이 불완전한 사숙에 전문과를 설치했다. 다소 무리한 짓이기는 했찌만, 능력이 닿는 한 수리를 기본으로 교육방침을 설정했다. 또 한편으로는 독립론을 주창하여, 아침저녁으로 입만 열면 그 필요성을 역설하고 연설이나 글을 통해서도 그 방향으로 이끌었다. 또한 스스로 갖가지 공부를 하여 몸소 실천하도록 노력하니, 더 한학을 멀리하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쿠의 출신이 사회 각 분야로 진출하여 그 신분이나 직업과는 상관없이 근본 도리에 소홀하지 않고, 고귀한 인격으로 독립의 기상을 지켜나가고 있다는 말을 들으면, 늙은 나에게는 가장 큰 기쁨이 된다.


 이상과 같이 나는 단지 한학을 멀리하고 소홀히 했을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위 부유와 부설을 일소해버리겠다고 젊은 시절부터 결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평소에 양학자나 통역사 같은 사람들이 한학자를 헐뜯는 것은 당연한 일이며 나쁜 짓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한학을 상당한 수준으로 공부했다. 공부를 했으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욕을 하니 미움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남들에게는 정말로 문외한인 척하면서도, 한한자들이사용하는 고사성어는 대부분 알고 있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렸을 때부터 꾀 까다로운 선생에게 어려운 경사를 배운 덕택에 열심히 강보했기 때문이다. 좌국사한 좌전, 국어, 사기, 한서의 약칭) 은 물론이고 시경, 서경 같은 경도, 또 노자, 장자처럼 묘미가 있는 글도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또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했다. 이것은 부젠 나카쓰의 대유 시라이시 선생 덕분이다. 이렇게 경사의 뜻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때로는 한학의 급소와 같은 곳을 찍어 이야기 중에나 책을 읽으면서 마구 공격을 해댓다. 이거야말로 '사자 몸속의 벌레'와 같으니 한학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정말 좋지 못한 외도를 한 셈이다. 그토록 내가 한학을 적대시한 것은, 지금 같은 개국 시절에 날고 뒤진 한설이 어린 소년들의 뇌리를 사로잡고 잇으면 도저히 서양문명이 일본에 들어올 수 없으리라고 굳게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무이다. 어떻게 해서든 그들을 구출해내 내가 믿는 길로 인도하고자 온 힘을 다했다. 내 자심을 말하자면, 일본 전국의 한학자들은 모두 나와라, 내가 혼자서 상대해주겠다 하는 식이었다.그러나 정부를 비롯해 세상 일반의 상황은 달랐다. 문명교육이 다소 보급되었다고는 하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도무지 양학의 진수를 느끼지 못하고 무슨 일에서건 결단을 내릴 때면 부득불 한서에 의지하여 만사를 그것으로 하결하려는 풍조가 퍼져 있었다. 반면에 나는 그 귀중하고 영묘불가사의한 한학의 거창한 주장을 업신여기며 적대시했으니 나 자신을 위해서는 아주 불리한 것이었다.


 272 page


 독립은 새로운 사례를 만든다.


 내가 뜻하는 바는 주쿠에 소년들을 모아서 원서를 읽히는 것만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이 폐쇄적인 일본을 개방시켜 서양류의 문명을 불러들이고, 부국강병을 통해 일본이 세계 가국에 뒤지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 그렇다고 이것을 입으로만 떠버릴게 아니라 가까이는 자신의 몸부터 시작해 무슨일이 있어도 언행이 불일치해서는 안된, 우선 내 한몸을 조심하고 일가의 생활을 돌보아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명심했다. 또 한편으로는 이 세상을 둘러보아 문명개화를 위해 하고자 하는 일이 있으면 남들 눈치 볼 것 없이 과감하게 시도했다. 예를 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학생들로부터 수업료를 거둔다든지, 무사의 혼이라는 쌍칼을 버리고 맨몸이 된다든지, 새로운 연설법(예로부터 일본에는 연설이라는 것이 없엇든데, 메이지 초기에 후카자와 등이 게이오주쿠에서 처음으로 시작했다. 외국의 스피치법을 일본에서도 실시해 보려는 의도에서 메이지 6션(1873) 초여름 무렵부터 연설토론 연습을 시작하여, 메이지 8년에 일본 최초의 연설회당인 미타 연설관이 게이오기주쿠 내에 세워졌다)을 주장하여 남들 앞에서 시범을 보인다든지, 저역서에서 고어 푠현을 없애고 평이한 현대어를 사용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보수적인 사람들은 싫어하지만, 다행히 내 저역서는 세상사람들의 요구에 부함하여 목마른 자에게 주는 물이나 가뭄의 소나기와 같아서, 정말 놀라운 판매고를 보였다. 시기를 잘못 타면, 어떤 문장가나 어떤 학자가 무엇을 저술하고 무엇을 번역하건 내 책처럼 팔릴 리가 없다. 필경 내 재능이 뛰어나다기보다는 시기를 잘 탄 탓이리라고 생각한다. 또 아마도 그 시절 학자들의 글솜씨가 형편없었거나, 지나치게 큰 뜻을 품어 자신의 주제도 모르는 채 세상일을 잘못 판단했거나 해서였을 것이다. 어쨋든 저역서는 나의 입신과 일가의 안정을 이루는 유일한 수단이 되었다. 덕분에 사숙을 개설해서도 생도들로부터 긁어모은 푼돈을 내 옷을 장만하는 따위의 째째한 짓에 쓰지 않고, 오로지 교사들의 급료로 지급할 수 있어쓰염, 때로는 내 자깁에서 돈을 꺼내 주쿠의 비용으로 충당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내 성격은 대체로 방임주의라고 할까, 아니면 욕심이 별로 없다고 할까. 주쿠의 일에 밤낮없이 신경을 쓰며 자질구레한 것까지 빠짐없이 열심히 돌보는 한편으로, 이 주쿠에만 매달려 있는 몸은 아니었다. 반드시 게이오기주쿠를 영구히 보존하겠다는 의무감도 없거니와 명예심도 없다고 애당초 작정하고 있었으므로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엇다. 동지인 후배들과 상의해서 뜻한 바대로 일을 추진하다 보면, 주쿠 내에 자연히 독자적인 기품이 생겨나 세상의 움직임과 일치하지 않은 일도 많았다. 또 내가 정계 진출을 원치 않는 재야의 몸이면서도 입도 있고 붇소 있으니 이런저런 발언을 하여, 때로는 그 발언이 정부의 신경을 건드리는 일도 있었을 것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정부에 대해 불만은 없다. 정치가들이 예전에 막무가내의 양이론자였다 해도 또 남들을 괴롭히는 자들이었다 해도, 일절 과거를 묻지 않고 오로지 오늘날의 문명주의로 전환해 개국 일변도로 국사를 운영해준다면 바랄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툭하면 관민이니 조야니 하며 구별을 해서 사숙을 소외시키고 눈엣가시처럼 여기며, 심지어는 사숙의 운영을 방해하려고 유치한 짓까지 하는 데는 다소 애를 먹었다. 지금 그 이야기를 하자면 이야기도 길어지고 표현도 거칠어질 테니 생략하기로 한다. 근년에 제국의회를 개설한 이래로 관가 주변의 풍조도 크게 개선되어, 그다지 심한 짓을 하는 경우는 없어졌다. 아마도 머지 않아 쌍방이 화해할 날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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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량 2009.08.30 16:38
    그들이 강대하다면 그렇게 강대한 이유를 밝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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